‘율법’에 대해 어떤 느낌인가요?
‘율법이 아니라 은혜로 구원받는다’는 말을 많이 하기에 율법에 대하여 부정적인 인상을 갖고 계신가요?
사회에서도 ‘율법적’이라는 말은 깐깐하게 세부 조항에 근거하여 평가하고 통제하는 성향을 의미합니다.
그런데 이런 질문과 답이 있습니다.
‘당신은 당신의 비참을 어디에서 압니까?’ ‘하나님의 율법에서 압니다.’
네, 이것은 하이델베르크 교리문답 제 3문의 질문과 그 답입니다.
바로 이 나쁜 느낌이라는 율법을 통해 사람의 비참함을 알 수 있다고 합니다.
사실 ‘율법이 아니라 은혜로 구원받는다’는 말은 율법을 다 지키는 행위를 통해서가 아니라 그리스도의 구속의 은혜로 구원받는다는 말입니다. 즉 이 말은 율법 자체가 나쁘다는 의미를 가지고 있지 않습니다.
단지 율법을 지키기 위한 노력을 바탕으로 의로움을 주장하는 율법주의가 나쁜 것입니다.
롬 11:6, ‘만일 은혜로 된 것이면 행위로 말미암지 않음이니 그렇지 않으면 은혜가 은혜 되지 못하느니라’
롬 3:21, ‘이제는 율법 외에 하나님의 한 의가 나타났으니 율법과 선지자들에게 증거를 받은 것이라’
이 말씀대로 우리의 구원은 율법을 지키는 행위로 말미암지 않습니다.
율법은 은혜로 의롭게 되는 하나님의 의에 대하여 이야기해줍니다.
율법은 하나님의 형상으로 지음받은 사람이 어떻게 하면 하나님의 뜻에 맞게 살아갈 수 있는지 알려줍니다.
타락한 사람은 스스로 하나님의 뜻을 알 수 없지만 하나님이 제시하여 주신 율법을 통해 무엇이 선이고 무엇이 악인지를 알게 됩니다. 그러므로 율법은 절대로 그 자체가 악하거나 나쁜 것이 아니며 사람의 자유를 제한하는 것도 아닙니다. 오히려 사람들에게 하나님의 뜻을 알려주는 귀한 도구입니다.
우리는 율법에 드러난 하나님의 뜻을 통해 사람의 비참에 대하여 깨닫고 사람이 율법을 모두 지킬 수 없다는 사실도 알게 됩니다. 한국어 성경에 ‘율법’이라는 단어가 약 300번 정도 나옵니다.
‘율법’이라는 단어가 사용될 때마다 그 전후 문맥을 고려해 보면 ‘율법’의 종류와 용도를 구분할 수 있습니다.
또한 ‘율법’의 종류와 용도를 파악하면 율법이 우리에게 요구하는 ‘네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고 뜻을 다하여 주 너의 하나님을 사랑하라 하셨으니 이것이 크고 첫째 되는 계명이요 둘째도 그와 같으니 네 이웃을 네 자신 같이 사랑하라 하셨으니 이 두 계명이 온 율법과 선지자의 강령이니라’는 사실을 깨닫게 됩니다.
또한 그럼에도 우리가 이 모든 율법을 완전하게 지킬 수 있는 존재가 못된다는 사실도 깨닫게 됩니다.
그럼으로 성도는 율법을 다 지켜야 한다는 생각을 넘어 그리스도를 통한 하나님의 의를 바라보아야 합니다.
매일 생각과 말과 행동으로 죄를 짓기에 매일 예수 그리스도를 바라보아야 합니다.
결국 율법을 제대로 이해하는 성도는 율법을 다 지킬 수 없는 한계로 인해 더욱 예수님을 구하고 찾고 바라보게 됩니다.
어느 누구도 두 번 사는 인생은 없습니다.
그래서 우리의 인생은 불확실성을 가지고 있습니다. 죽을 때까지 불확실은 없어지지 않습니다. 우리는 해보지 않은 것을 하고 있고, 가보지 않은 길을 가고 있습니다. 우리가 어떤 일을 하든지 불확실성은 항상 존재합니다.
불확실한 미래는 모든 사람에게 똑같습니다. 그러나 우리에게는 주어진 축복이 있습니다.
바로 하나님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의 미래가 되십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신뢰할 때, 하나님께서 우리의 미래를 만들어 가실 것입니다. 하나님의 사랑을 믿고, 미래가 하나님의 손에 있음을 믿는 사람은 주저함 없이 확신을 가지고 앞으로 나아가게 됩니다. 그때 그 믿음의 사람을 통해 하나님의 역사가 일어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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